본문 바로가기

[여행 작가 박상준의 북촌기행 시리즈 #2] 윤보선길

2023.01.13 5min 16sec

지하철 3호선 현대건설역. 서울교통공사가 진행한 '지하철 역명 유상병기 사업자 공모'로 인해 지난 9월부터 안국역에 붙여진 새로운 부역명입니다. 현대건설인에게는 삶의 터전이자 일상공간인 안국역. 이곳의 숨은 이야기와 매력을 전문가의 시각으로 만나봅니다.



공工과 예藝, 이름 없는 꽃들의 환생 

윤보선길과 서울공예박물관 산책



지난 2021년 7월 개관한 서울공예박물관 전경. 북악산과 현대건설 본사 건물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습니다.(사진=서울공예박물관 제공)

[ 지난 2021년 7월 개관한 서울공예박물관 전경. 북악산과 현대건설 본사 건물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습니다.(사진=서울공예박물관 제공) ] 



왕자와 대통령이 살던 골목


안국 현대건설역 1번 출구 옆 오른쪽 골목길로 이어진 윤보선길의 풍경. 다양한 상점들이 오밀조밀 모여 정겨운 풍경을 만듭니다.

[ 안국 현대건설역 1번 출구 옆 오른쪽 골목길로 이어진 윤보선길의 풍경. 다양한 상점들이 오밀조밀 모여 정겨운 풍경을 만듭니다. ] 


북촌 윤보선길은 안국 현대건설역 1번 출구 옆 오른쪽 골목입니다. 골목이라기에는 너르지만 산책의 즐거움은 ‘골목’과 잘 어울립니다. 윤보선길이라는 도로명은 우리나라 4대 대통령 이름에서 땄습니다. 초입에서 약 250m 정도 거리에 윤보선가가 있습니다. 이 길은 별궁길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안동별궁(안국동별궁)’이 있었던 까닭입니다. 안동별궁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가례(嘉禮), 즉 결혼식이 치러진 궁입니다. 조선 초에는 세종이 막내아들인 영응대군을 위해 지은 동별궁의 자리였고요. 세종 역시 이곳에서 임종했습니다. 한일강제합병 후에는 환관과 궁녀들의 거처로 쓰이기도 했죠. 1944년 그곳에 풍문여고가 개교했고, 자곡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자리하기도 했습니다.


서울공예박물관의 존재를 뚜렷하게 각인시키는 원형의 교육동(左) 전경과 풍문여고 과학관의 외관을 그대로 살려 리모델링한 전시3동(右) 모습 (사진=서울공예박물관 제공)

[ 서울공예박물관의 존재를 뚜렷하게 각인시키는 원형의 교육동(왼쪽) 전경과 풍문여고 과학관의 외관을 그대로 살려 리모델링한 전시3동(오른쪽) 모습 (사진=서울공예박물관 제공) ] 


최근 윤보선길의 첫 인상은 확연하게 달라졌습니다. 풍문여고 건물을 리모델링하고 새로 지어 2021년 7월에 서울공예박물관이 개관했기 때문입니다. 서울공예박물관의 전시3동은 윤보선길과 제일 먼저 맞닿아 있습니다. 과학관으로 사용됐던 이 건물은 구조와 재료에 남다른 관심을 보인 김정수 건축가가 1965년 설계해 프리캐스트* 공법을 적용해 만든 것입니다. 서울공예박물관은  옛 건물의 외관을 그대로 살린 대신, 건물 외벽에 크래프트윈도우(Craft Window)를 배치했습니다. 크래프트윈도우는 길가에서 공예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한 윈도우갤러리입니다. 덕분에 학교 뒷길의 속닥속닥한 맛은 줄었지만 윤보선길의 첫인상은 한층 환합니다. 근래는 감각적인 카페와 숍이 하나둘씩 늘어나며 점점 힙(hip)한 골목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또 괜스레 카페 이드라 같은 곳을 추천하고 싶어집니다.

* 프리캐스트: 콘크리트 블록이나 슬래브 등을 공장에서 제작해 설치하는 공법입니다.


윤보선길 초입에 위치한 카페 이드라는 낮은 담장 안쪽에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 윤보선길 초입에 위치한 카페 이드라는 낮은 담장 안쪽에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 


카페 이드라는 윤보선길 골목 초입에 숨어 있는 카페입니다. 이드라는 그리스의 작은 섬 이름이고요. 커피를 좋아해 카페를 연 노신사가 10년 넘게 드립커피를 직접 내려주는데요. 그 모습이 한 편의 영화 같습니다. 여행을 떠나온 듯도 하고요. 실제로 홍상수 감독의 <풀잎들>(2018)과 이제한 감독의 <소피의 세계>(2021) 같은 영화 속에도 등장했습니다. 이제한 감독은 카페 이드라에서 시나리오를 썼다고 합니다. <소피의 세계>는 외국인 소피가 나흘간 머물며 여행한 기록이 주를 이루는데요. 영화 속 발자취는 윤보선길과 북촌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조선의 몬드리안과 마크 로스코


서울공예박물관 안내동과 전시3동의 모습 (좌측), 책 커버라 믿기 어려운 ‘자수 연화당초문 현우경 표지’ (우측) (사진=서울공예박물관 제공)

[ 서울공예박물관 안내동과 전시3동의 모습 (왼쪽)책 커버라 믿기 어려운 ‘자수 연화당초문 현우경 표지’ (오른쪽) (사진=서울공예박물관 제공) ] 


서울공예박물관은 전시3동만이라도 꼭 돌아보길 추천합니다. 전시3동은 사전가 직물관입니다. 사전가는 ‘사전絲田이 사는 집’이란 뜻입니다. 사전은 故 허동화(1926~2018)의 아호로, 전시 3동은 한국자수박물관 관장을 지낸 허동화와 그의 아내 박영숙이 기증한 컬렉션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수집은 그들의 ‘시간과 정성’을 빌려, 우리 앞에 이름 없는 예술의 혼들을 불러냅니다. 선과 선을 이어 자수를 놓고, 면과 면을 이어 보자기를 만드는 건 일상의 소용을 만드는 일이었을 겁니다. 그 안에 반짝이는 무언가는 길고 긴 시간을 넘어와 오롯한 예술의 경지로 오늘의 우리를 감탄케 하고요. 그러니 유물이 아닌 회화를 관람하듯 돌아봐도 좋겠습니다.


전시3동은 미술관이라 해도 깜빡 속을 겁니다. 자수와 보자기가 가진 아름다움은 현대미술의 추상화인 양 감탄을 자아냅니다. ‘자수 연화당초문 현우경 표지’부터 놀랍습니다. 책의(冊衣), 즉 책의 옷에 해당하는데요. *평수와 *매듭수로 표현한 연꽃, 복숭아, 석류 문양은 *윌리엄 모리스의 북디자인과 견줄 만합니다. 

* 평수: 선을 긋듯 실을 촘촘히 채워 메우는 자수의 기법입니다. 

* 매듭수: 씨앗 모양으로 꽃술을 표현한 자수의 기법입니다.

* 윌리엄 모리스: 영국의 디자이너이자 시인, 소설가로, 19세기 미술공예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자수 화조도 10폭 병풍’ 앞에서도 걸음을 떼지 못합니다. 매화, 모란과 새 등을 수놓았는데요. 병풍 폭마다 바탕천의 색이 달라 은은한 무지개 위에 그린 꽃밭인 듯 보입니다. 보자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건을 감싸거나 덮기 위해 쓰이던 일상의 도구는 박물관에서 처음 주인공이 되었을 겁니다. 그림처럼 펼쳐 걸으니 몬드리안의 구성과 *마크 로스코의 울림이 공존합니다. 무엇보다 작품에 적힌 ‘조각보자기, 마 쪽모이, 19~20세기’같은 푯말이 뭉클하네요. 규격과 재료만 적었을 뿐 만든 사람의 이름은 없습니다. 예술가가 아닌 보통의 사람, 우리의 어머니이자 할머니이기도 한 옛 여성의 손끝에서 생활의 꽃처럼 피어난 작품입니다. 

* 마크 로스코: 러시아 출신 미국 화가로 추상표현주의의 선구자로 불립니다.


지난해 10월 공개된 열린송현 녹지광장. ‘이건희 기증관’ 건립이 본격적으로 착수되기 전인 2024년 상반기까지 시민에게 공개될 예정입니다.

[ 지난해 10월 공개된 열린송현 녹지광장. ‘이건희 기증관’ 건립이 본격적으로 착수되기 전인 2024년 상반기까지 시민에게 공개될 예정입니다. ] 


서울공예박물관은 개개의 건물이 떨어져 있지만, 공중 연결 통로가 이어져 골목을 탐구하는 듯 흥미롭습니다. 특히 전시3동과 1동의 이동로는 창밖 전망이 빼어나 눈이 호강합니다. 때마침 박물관 마당 건너 서쪽에는 열린송현녹지광장이 지난해 10월 개장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식산은행 사택으로, 광복 후에는 미국 대사관 숙소로 110년 동안 가려져 있던 땅입니다. 이전에는 그 이름처럼 소나무가 무성한 언덕이었겠지요. 그 옛날 솔숲의 콧노래가 들리는 듯도 합니다. 


동네 마트와 웨딩반지 매장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는 윤보선길(左) 모습과 골목 사이로 보이는 현대건설 계동 본사 사옥 모습(右).

[ 동네 마트와 웨딩반지 매장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는 윤보선길(왼쪽) 모습과 골목 사이로 보이는 현대건설 계동 본사 사옥 모습(오른쪽). ] 


서울공예박물관의 반대편 동쪽은 윤보선길입니다. 안내동과 전시3동의 틈사이로 오래 가게 이화마트와 웨딩반지 매장 푸딩다이아(PUDINGDIA)가 액자 속 자매처럼 자리하네요. ‘쌀’이라는 페인트 글씨와 다이아몬드는 분명 다른 물성일터인데 하나로 빛이 납니다. 건물 위로는 3층보다 높게 자란 나무들이 또 기웃댑니다. 그리고 그 너머에 15층 건물 한 동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왠지 낯이 익습니다. 현대건설 사옥입니다. 



윤보선길에서 만난 솜씨


박물관보다 산책의 묘미를 길게 누리고 싶다면, 서울공예박물관을 지나쳐 걸어도 무방합니다. 또는 안동별궁이 있던 서울공예박물관 앞마당을 지나 송현열린녹지광장을 한 바퀴 거닐어 봐도 좋겠고요. 윤보선길로 돌아올 때는 서울공예박물관 북쪽 어린이박물관과 덕성여고 사이 좁은 골목을 택합니다. 폭이 2미터나 될까 모르겠습니다. 오직 담장과 담장 사이로 난 길은, 꽤나 무뚝뚝하지만 평양냉면처럼 슴슴한 정겨움이 있습니다. 


‘양반 교회’라 불리기도 하는 안동교회(左)와 솟을대문이 멋스러운 윤보선가의 입구(右).

[ ‘양반 교회’라 불리기도 하는 안동교회(왼쪽)와 솟을대문이 멋스러운 윤보선가의 입구(오른쪽). ] 


윤보선길과 다시 만나는 길목에서는 왼쪽으로 걷습니다. 자그마한 카페와 갤러리에서 어뜩 인사동의 표정이 스칩니다. 그러다 마주한 안동교회 소허당과 윤보선가 구간은 또 가회동 한옥마을을 떠올리게 합니다. 

안동교회의 이력은 조금 특별합니다. 외국인 선교사가 아닌 북촌 양반들이 1909년에 직접 세운 교회입니다. 그래서 ‘양반교회’라 불립니다. 길과 접한 교회 데크 쉼터 맞은편은 윤보선가의 솟을대문입니다. 윤보선가는 민영익* 의 아들 민규식이 1870년경에 지었습니다. 서울상류민가의 풍모를 갖춘 대저택으로 동서양의 특징이 공존하죠. 지금은 윤보선 전 대통령의 자손들이 살고 있으며, 코로나(Covid-19) 이전에는 일 년에 한두 차례 개방했었다고 합니다. 윤보선가를 지나면 조선어학회 터가 나옵니다. 조선어학회는 ‘주시경의 제자들이 한글의 연구와 발전을 목적으로 발족한 조선어 연구회의 후신’입니다. 1942년 일제의 의해 활동이 중단된 이 학회는 우리에게는 영화 <말모이>로 친숙하기도 합니다.

* 민영익: 1875년(고종 12) 명성황후의 오빠인 민승호(閔升鎬)와 그의 아들이 죽은 뒤 양자로 입양된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로 글씨와 그림에 능하였습니다.


윤보선가와 등을 맞댄 빨간 벽돌이 인상적인 갤러리 ‘갤러리 담’(左)과 한옥찻집 ‘티테라피’(右).

[ 윤보선가와 등을 맞댄 빨간 벽돌이 인상적인 갤러리 ‘갤러리 담’(왼쪽)과 한옥찻집 ‘티테라피’(오른쪽). ] 


조선어학회 터에서 오른쪽으로 접어드니 ‘갤러리 담’, ‘티테라피’, ‘송원아트센터’가 차례로 나오네요. 이 세 장소는 윤보선길의 보물 같은 명소입니다. 특히 갤러리 담과 티테라피는 윤보선가와 등을 맞댄 집입니다. 

갤러리 담은 빨간 벽돌과 담쟁이가 조화롭습니다. 15년 넘게 길을 지키고 있어 미술관 앞 문관석이 윤보선길 예술의 문지기인 양 여겨지기도 합니다. 옥상이 개방될 때는 윤보선가를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곁자리 티테라피는 한옥 찻집입니다. 원래 윤보선가에 속했던 건물입니만 그리로 치부하기는 아깝습니다. 한국관광공사의 웰니스관광지로 체질별 차를 처방 받아 마시고 족욕을 즐길 수 있는 도심 속 휴식처입니다. 


조민석 건축가가 설계한 삼각형 피라미드 형상의 송원아트센터는 윤보선길 끝자락에 위치합니다.

[ 조민석 건축가가 설계한 삼각형 피라미드 형상의 송원아트센터는 윤보선길 끝자락에 위치합니다. ] 


송원아트센터는 윤보선길과 북촌로5길이 만나는 예각에 위치합니다. 조민석 건축가가 2층 양옥집을 개조해 설계했습니다. 2014년 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에서 한국관은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는데요. 당시 커미셔너가 조민석 건축가였지요. 건물은 삼각형 피라미드가 떠받힌 형상이 이채롭습니다. 지상은 2층이지만 지하가 3층으로 깊습니다. 문화재인 윤보선가로 인해 높이의 제한이 있었을 겁니다. 전시가 열린다면 주저 없이 문을 두드릴 일입니다.


안국 현대건설역 근방 윤보선길 지도


서울공예박물관에서 출발한 윤보선길은 송원아트센터에서 끝이 납니다. 몸을 돌리는데 윤씨고가구의 느슨한 입구가 보이네요. 차양 사이로 설핏 드러난 창문에는 재동공예사라는 빨갛고 파란 손 글씨가 두드러집니다. 송원아트센터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다른 시대를 사는 듯합니다. 그 상반된 어울림이 윤보선길의 매력이겠지요. 공예가 장인을 뜻하는 공(工)과 예술을 의미하는 예(藝)로 이뤄진 것처럼요. 그 자리에 서서 과연 예술은 무엇인가 물어봅니다. 옛 장인들에게 공예는 예술 이전에 삶을 지탱하는 행위였고 묵묵한 반복의 과정이었을 테니까요. 어떤 필요와 요구에 의해 부지런히 손을 놀렸겠지만 때로는 그게 누구의 것이 될지조차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연히 몇 백 년 후에 예술로 대접받게 될 것도 몰랐을 테고요. 그러니 오늘 이 길에서 기억되어야 할 건 윤보선이라는 길의 주인공이 살던 집이기도 할 테지만, 이름 없이 쓰인 공예가들의 흔적이기도 할 겁니다. 그래서 김 씨라거나, 이 씨라거나 성조차 알려지지 않은 그 이름들을 아름다운 ‘솜씨’라고, 농담처럼 정겨이 불러내봅니다. 



글. 박상준

대학에서는 조경학을 전공하고, 여행주간지 〈프라이데이〉와 영화주간지 〈씨네버스〉 취재기자로 일했습니다. 지금은 여행작가로 활동 중이며 한국관광공사 등에 일상과 밀착한 여행 정보를 전하고 있습니다. 서울 계동과 부암동을 좋아합니다. 저서로는 <서울 이런 곳 와보셨나요?> <오!!! 멋진 서울> <엄마, 우리 여행가자> <다른 제주에 가다> <울릉도100배 즐기기> 등이 있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의 주관적인 견해이며, 현대건설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사진=서울공예박물관, 이슬기 / 인포그래픽=김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