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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들려주는 봄의 향기 “봄꽃을 건네는 각별한 마음”

2022.03.07 2min 48sec

봄과 어울리는 동사를 떠올려봅니다. 열다, 싹트다, 자라다, 시작하다, 피어나다··· 결심이 비로소 움직임으로 이어지는 시기가 어쩌면 봄일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봄꽃을 선물한다는 것은 시작을 응원하겠다는 각별한 마음을 건네는 것이기도 합니다. 봄이 오면 늘 떠올리는 문장이 있습니다. 꽃이든 사람이든, 지기 전에 먼저 피어야 한다는 것. 봄에 선물하기 좋은 꽃에 대해 소개하는 일은 함께 피어나자고 속삭이는 일이기도 합니다. 


모두를 우아하게, 튤립


튤립 꽃다발


튤립을 처음 봤을 때 소리 내어 말했습니다. “아, 예쁘다.” 유치원 소풍 때였던 듯싶은데, 흰색, 노란색, 분홍색, 보라색의 꽃에 잠시 홀렸던 것도 같습니다. 아플까 봐, 다칠까 봐 차마 만지기도 겁이 났죠. 나중에 ‘우아하다’라는 단어를 배웠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것도 바로 튤립이었습니다. ‘고상하고 기품이 있으며 아름다운’ 꽃이 내게는 튤립이었죠. 튤립의 나라로 알려진 네덜란드에서는 매년 봄 정원에 한가득 튤립이 핀다고 합니다. 그 장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에 불이 붙습니다. 송이송이 바라볼 때는 수줍던 것이 정원에 만발하면 웅성웅성 다양한 이야기가 들릴 것만 같아요. 몇 년 전, 친구로부터 튤립은 색깔마다 꽃말이 다르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빨간색 튤립은 열정적인 사랑을 뜻하는 데 반해 노란색 튤립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선물할 때만큼은 튤립 색을 유심히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선물을 주는 사람도, 그것을 받는 사람도 모두 우아하게 만들어주는 꽃이 바로 튤립입니다.


시작을 응원하는, 프리지어


노란 프리지어 꽃사진


봄을 알리는 색깔은 뭐니뭐니 해도 노란색입니다. 길을 거닐 때 영춘화와 개나리를 보면 마음이 법석입니다. 연노랗고 샛노란 것들이 담장을 수놓는 모습을 볼 때면, 노란 꽃은 봄을 알리는 동시에 봄을 반기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럴 때면 꽃집에 들어가 프리지어 한 다발을 삽니다. 저렴한 것도 장점이지만, 어떤 꽃집에 들어가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어서이기도 하죠. 활짝 핀 프리지어는 금방이라도 스프링처럼 튀어 오를 것만 같은 천진난만함을 선사합니다. 노란 꽃망울이 초록 꽃대에 맺혀 있는 모습은 직전의 두근거림을 품게 만듭니다. 봄철에도 잘 익은 벼이삭을 떠올릴 수 있음은 물론입니다. 나를 위해 가장 많이 사는 꽃도 다름 아닌 프리지어입니다. “새로운 시작을 응원합니다”라는 꽃말 때문인데요. 프리지어는 새해에 했던 다짐을 곱씹으며 봄에 다시 한번 나를 일으켜 세우는 꽃입니다.


진심이 담긴, 카네이션


카네이션


본디 여름 꽃으로 알려져 있지만, 봄에 더 많이 찾게 되는 꽃이 카네이션이 아닐까 싶습니다. 온실 재배 덕분에 감사함을 표하는 자리에는 늘 카네이션이 있었습니다. 굳이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고마운 상대에게 건네는 꽃다발에는 어쩐지 꼭 카네이션을 넣어야 할 것 같습니다. 부모님과 선생님께 달아드렸던 카네이션은 으레 빨간색이었는데, 그도 그럴 듯이 빨간 카네이션은 존경과 사랑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한편 미국에서 분홍색 카네이션은 어머니날을 상징하는 꽃입니다. 헌신의 의미도 있다고 하니, 결혼기념일에 선물하기에도 안성맞춤이죠. 물론 말 한마디, 글 몇 줄만으로도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지만, 카네이션과 함께라면 말과 글에 진심을 담을 수 있을 것입니다. 카네이션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꽃잎의 주름이 선명하게 그려집니다. 주름이 담고 있는 기나긴 시간, 어쩌면 그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기 위해 우리는 카네이션을 선물하는 것이 아닐까요.


마음이 차오르는, 작약


작약


작약은 신비로운 꽃이다. 꽃잎이 적은 것도 있고 풍성한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작약도 탐스럽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비밀한 사연을 겹겹이 떠안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미처 전하지 못한 고백 같기도 하고, 아직 세상에 내보이지 않은 잠재력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소담한 꽃봉오리일 때부터 시든 뒤 낱낱의 잎으로 떨어질 때까지, 매 순간 각기 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꽃입니다. 유희경의 시집 <오늘 아침 단어>(문학과지성사, 2011)에는「심었다던 작약」 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그 시에 등장하는 다음 구절은 작약이 품고 있는 특유의 환함과 가능성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네가 심은 작약이 어둠을 끌고 와 발아래서 머리 쪽으로 다시 코로 숨으로 번지며 입에서 피어나고, 둥근 것들은 왜 그리 환한지 그게 아니면 지금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복을 눈으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환하고 동그랄 것입니다. 작약을 선물할 때마다 복을 건네는 마음이 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받자마자 걷잡을 수 없이 차오르는 마음, 이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마음이니까요.


궁금한 누군가에게, 라넌큘러스

라넌큘러스
다발이 아닌 한 송이를 선물할 때면 나는 고민 없이 라넌큘러스를 고릅니다. 한 송이만으로도 충분한 느낌, 한 송이여서 왠지 더 오롯한 느낌 때문입니다. 꽃말처럼 ‘매혹’적인 라넌큘러스는 왠지 다른 라넌큘러스와 그 매력을 나누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돋보이고 싶어 한다기보다는 고스란히 있고 싶어 한다는 느낌에 더 가깝습니다. 개구리를 뜻하는 라틴어 ‘라이나’에서 꽃 이름이 유래했다고 하는데, 주로 연못이나 습지에서 자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수백 장의 꽃잎이 포개어져 꽃망울을 이루는데, 한 장 한 장에 사연이 깃들어 있을 것만 같습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고 하는데, 라넌큘러스의 속도 헤아리기 힘듭니다. 그러나 상대를 다 알게 됐을 때 허망하기도 하므로 이 ‘모름’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화려한 인상 속에 감추어진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가까워지고 싶은 누군가가 생겼을 때, 라넌큘러스를 선물하는 것은 어떨까요. 당신을 알고 싶다고, 이제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라고.


달콤하게 기억하는, 히아신스


히아신스


알뿌리 식물로 잘 알려진 히아신스에 매료된 것은 향 때문이었습니다. 히아신스 특유의 달콤한 향은 계속해서 코를 킁킁거리게 만들었죠. 달콤함뿐 아니라 그윽함까지 가지고 있어 누군가를 자꾸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히아신스와 한 공간에 있으면 그리운 누군가가 자연스럽게 소환됩니다. 꽃의 색깔에 따라 향의 진하기가 다른 것도 히아신스의 특징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정도로 그리운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라도 하듯 말이죠. 푸른색 히아신스의 향이 가장 강한데, 향을 맡고 있노라면 문득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하지는 않아도 누구나 그리운 이와 함께했던 그때 그곳을 떠올릴 것입니다. 흐릿한 기억이 강렬한 향 덕분에 점점 선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애타게 그리워만 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에게 히아신스만 한 선물이 또 있을까요. 달콤한 향으로라도 한동안 그 사람 곁에 남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글=오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