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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선 인문학 여행] ‘대문호’ 괴테의 인생을 좇아 떠나는 이탈리아

2021.03.19 2min 37sec

독서를 즐기지 않는 사람도 괴테라는 이름은 들어봤을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파우스트』 등 250년이 지난 지금도 독일의 대표 작가이자 대문호로 추앙받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인상적인 사건은 바로 이탈리아 여행이었다. 예술가이자 공직자로서 성공가도를 달리던 그가 37세 생일날 밤에 홀연히 이탈리아로 떠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 ]


문학이 하고 싶었던 변호사이자 정치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이하 ‘괴테’)는 ‘엄친아’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호텔업을 하던 여인과 두 번째 결혼을 한 후 재력가로 거듭났다. 덕분에 괴테의 아버지 요한 카스파 괴테는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아 풍족한 생활을 누렸다.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아주 자유로웠고 중년 이후에는 괴테와 여동생 코르넬리아의 교육에 올인했다(괴테의 부모님은 아이 여섯을 낳았으나 4명은 어린 시절 병으로 죽고 두 남매만 남았다). 

괴테의 아버지는 매우 엄격한 사람이었다. 지진으로 유럽 전역이 공포에 휩싸였을 때에도, 천연두와 같이 심한 병을 앓았을 때에도 아버지는 몸이 나으면 그간 못했던 공부를 몰아서 시켰다. 그가 부유하고 남부러울 것 없는 배경에서 자랐음에도 사색에 잠기는 청년이 된 이유다.

괴테는 아버지의 뜻대로 독일 라이프치히 법대에 갔다. 문학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허락 없이는 불가하다는 교수님의 반대에 부딪혀 법을 전공한 것이다. 하기 싫은 공부를 해서인지 괴테는 큰 병을 앓게 되고, 공부를 잠시 중단한 후 고향 프랑크푸르트에 돌아와 쉬어야 했다. 아버지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괴테가 못마땅했고, 의지만 있으면 병이 나을 수 있다며 그를 다그쳤다. 병이 나은 뒤 다시 대학에 돌아간 괴테는 공부를 마치고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아버지는 기뻐하며 열정적으로 그를 도왔지만, 괴테는 유능한 변호사가 되지 못했다. 문학적 영감이 가득한 괴테에게 감정을 배제한 이성적인 일은 아마도 힘들었을 것이다.

베츨라어 소재의 고등법원 견습생으로 일할 때에는 괴테에게 가장 괴로운 시기였다.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해야만 하는 공허함, 집에서 떠나온 외로움, 운명이라 믿었던 여인 샤를로테 부프와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친구의 약혼녀였다) 등 여러 어려움이 겹쳤기 때문. 괴테는 이런 고통과 고뇌를 안고 창작활동에 매진한다. 그러다 친구의 약혼녀를 사랑하다 스스로 삶을 마감한 빌헬름 예루살렘의 사건을 접하며 휘몰아치듯 4주 만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펴낸다. 괴테는 이 책으로 스물다섯 살에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작가로 등극했다.

그로부터 2년 뒤 괴테는 카름 아우구스트 대공의 초청으로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바이마르(독일 중동부 도시)에 살게 된다. 아우구스트 대공에게 바이마르에서 연봉이 두 번째로 높은 고위직과 일름 공원 안에 작은 이층집을 받은 괴테는 20대 후반과 30대 중반 시절을 이곳에서 보내면서 정치를 하게 된다. 그렇게 10년을 바쁘게 지내던 괴테는 점점 영감이 말라비틀어지는 것을 느끼고, 자신의 생일날 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도망치듯 이탈리아로 떠난다.


언제나 꿈에 그리던 곳, 이탈리아

괴테는 장 필립 뮐러라는 가명으로 신분을 숨기고 이탈리아에 발을 내딛는다. 여행의 시작은 이탈리아 북부의 베로나. 그곳에서 괴테는 아레나(원형 경기장)에 시선을 빼앗긴다. 오늘날에도 극장으로 사용되는 아레나를 보며 괴테는 민중의 개념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모이기 전에는 들쑥날쑥 규칙도 없이 산만하지만, 아레나라는 건축물에 모이면 질서정연한 하나의 고상한 단체로 변한다는 것이다.


괴테가 감탄한 이탈리아 베로나의 아레나

괴테가 감탄한 이탈리아 베로나의 아레나 ]


그는 이어 ‘물의 도시’ 베네치아로 향한다. 괴테는 물 위를 떠다니는 곤돌라를 보며 어린 시절 갖고 놀았던 곤돌라 모형을 회상하고, “세상 어느 광장도 산마르코 광장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며 베네치아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유명 인사였던 괴테는 베네치아에서 완벽한 고독을 만끽할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이 시기 그의 내면세계는 더욱 깊어졌으며, 성숙한 문학가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된다.

이후 괴테는 평생 사랑했던 도시 로마에 당도한다. 포폴로 광장을 걸으며 “익시온(제우스의 아내 헤라에게 흑심을 품은 죄로 불타는 수레바퀴에 영원히 묶인 그리스신화 속 인물)처럼 바퀴에 끌려가더라도 불평하지 않겠다”라고 할 정도였다. 인생 대부분을 로마를 그리워했다고 말할 정도로 꿈꿔 왔기에 로마를 마주한 그의 감회는 정말이지 벅찬 것이었다. 괴테는 로마에서의 나날을 자신의 ‘제2의 탄생일’이라고 쓰기도 했다. 


괴테가 로마에서 머물렀던 곳은 현재 카사 디 괴테 뮤지엄이 됐다.

괴테가 로마에서 머물렀던 곳은 현재 카사 디 괴테 뮤지엄이 됐다. ]


괴테는 로마 코르소 거리에 사는 지인 화가 티슈바인의 집에서 머물렀다. 포폴로 광장 바로 앞인 데다, 스페인 광장에서 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환상적인 위치였다. 그는 티슈바인과 함께 밤마다 로마 거리를 산책하고, 그림을 그리고, 편지를 쓰고, 집필 활동을 했다. 괴테는 말년에 자신의 비서였던 에커만에게 회고하기를 “나는 로마에 있을 때에만 정말로 인간답게 느꼈다. 그처럼 높은 감정도, 그와 같은 행복감도 그 후에는 다시는 느끼지 못했다. 로마 체류에 비교하면 그 이후의 일들은 결코 그만큼은 즐겁지 않았다”고 털어놓는다. 이처럼 로마에서의 체류는 괴테의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다.

다음 행선지는 나폴리. 괴테는 “나폴리는 낙원과 같은 곳이다. 누구나 마치 취한 것 같은 자기 망각 속에 살고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며 나폴리를 평한다. 나폴리는 따뜻한 지중해성 기후를 가진 도시다. 온화한 날씨는 과일과 야채를 무한히 주었고, 자연히 생계 걱정이 줄어든다. 가난하지만 행복할 수 있는 이유다. 나폴리에 푹 빠진 괴테는 지중해 풍경에 반해 시칠리아까지 다녀온다. 그리고 다시 로마에 가 1년을 더 머문다. 

괴테는 1786년 9월부터 1788년 6월까지 이탈리아에 머물렀다. 여행을 하며 꼼꼼히 써둔 기행문과 편지들을 모아 말년에 이탈리아 기행을 펴내기도 했다. 이탈리아 여행에 진심이었던 괴테답게 책에는 로마, 베네치아, 나폴리 등을 찬양하는 글들이 가득하다. 이 책은 수많은 청춘과 문학 순례자에게 이탈리아 여행 가이드 역할을 하고 있다.

괴테가 스스로 가장 행복했다고 회상하는 곳, 이탈리아. 그 이유는 아마 이곳에서 자신이 성큼 성장했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을 키우는 곳, 로마에 대한 괴테의 정의를 쓰면서 랜선 인문학 여행을 마무리해 본다. “여기는 과거에도 위대한 곳이었고, 지금도 위대한 곳이며, 앞으로도 위대한 곳일 겁니다.”


글=박소영 리얼인문학 대표